근대 초기 생물학의 발전
유럽의 르네상스로 인해 경험적 박물학과 생리학에 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베살리우스는 일련의 해부학자 중 생리학과 의학에서의 스콜라주의를 경험주의로 점차 대체하고, 과거의 권위와 추상적 추론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존한 첫 번째 해부학자였다. 1543년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시체 해부를 기반으로 한 인체해부학에 대한 저서 《인체 해부학 대계》(De humane corporas fabrics), 일명 《파프리카》(fabrics)를 통해 서양 의학의 근대 시대를 열었다. 또한, 본초학에 근거한 의학에서 약초의 이용은 새로운 경험주의에 바탕을 둔 식물 연구의 원천이 되었다. 오토 브룬펠스, 히에로니무스 보크 및 레온하르트 호크스는 야생 식물에 대한 광범위한 저작을 남겼으며, 이는 식물의 삶 전체를 자연에 기반을 둬서 기술하는 접근법의 시작이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대부분에 걸쳐 박물학을 지배한 것은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고, 계통을 세우는 것이었다. 칼 폰 린네는 1735년에 자연계에 대한 기본적인 분류법을 발포했으며, 1750년대에는 자신이 기재한 모든 종에 학명을 도입했다. 베스티아리(동물에 대한 자연적이고 비유적인 지식을 결합한 동물우화집) 또한 윌리엄 터나, 피에르 블록, 기욤 롱드레, 콘라트 게스너, 울리세 알들로 반디 같은 박물학자들에 의해 더욱 정교해졌다. 린네는 생물 종을 설계된 계층 구조의 불변하는 부분으로 생각했지만, 18세기의 박물학자인 르클레르 뷔퐁은 생물 종을 인위적인 범주로 분류하고, 생물을 가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공통 조상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비록 진화에 대해 반대했지만, 뷔퐁은 진화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연구는 라마르크와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종의 발견과 기재, 표본 수집은 과학자에게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기업가에게는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 되었다. 수많은 박물학자가 과학 지식과 모험을 찾아 지구 곳곳을 탐험하였다. 특히 파라 켈수스의 연구에서 전통적인 연금술과 주술은 살아있는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주장되었다. 연금술사들은 유기물을 화학 분석에 사용하고, 여러 생물과 광물들의 약물 효과에 대해 자유롭게 실험했다. 알브레히트 뒤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예술가들은 종종 박물학자들과 함께 동물과 인간의 몸에 관심을 두고, 생리학을 자세히 연구하고, 해부학 지식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자연을 유기체에 비유하던 전통적인 관점은 자연을 기계에 비유하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17세기까지 계속된 세계관(기계론의 부상)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베살리우스의 연구를 살아있는 사람과 동물에 대한 실험으로 확대한 윌리엄 하비와 다른 자연 철학자들은 혈액, 동맥과 정맥의 역할에 관해 연구하였다. 1628년에 출간된 하비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Exercitatio Anatomic de Mote Cordie ET Sanguinis in Animalibus)는 기존 갈레노스의 이론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산토리오 산토리오의 신진대사에 관한 연구와 함께 생리학에 대한 정량적인 접근법의 모델로 큰 영향을 남겼다. 1670년대에 안톤 판 레이우엔훅에 의한 렌즈 제작 기술의 극적인 발전으로(단일 렌즈로 최대 200배까지 확대할 수 있었음) 학자들은 정자, 세균, 원생동물, 미시 생명체의 기묘함과 다양성에 대해 관찰, 발견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에 생물학의 미시 세계에 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몇몇 렌즈 제작자들과 자연 철학자들은 16세기 후반부터 조잡한 현미경을 만들고 있었고, 로버트 훅은 1665년에 자신의 현미경으로 관찰한 것에 기초한 《마이크로 그라피아》(Micrographia)를 출판했다. 제기랄 메이르 담의 연구는 곤충학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현미경 관찰 시 분리 과정 및 염색 과정에서 기본 기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인해 다양한 지식이 소실되고 파기되었지만, 의사들은 여전히 그리스 전통을 의학 훈련과 실습에 적용했다.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세계에서 많은 그리스 작품이 아랍어로 번역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대부분이 보존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가 저술한 《새와 사냥하는 기술》(De Arte venandi cum avi bus)은 조류 형태학을 탐구한 중세 시대의 영향력 있는 박물학 문헌이다. 유럽 대학들의 부상은 물리학과 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생물학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중세 성기에는 빙겐의 힐데가르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몇몇 유럽 학자들이 박물학에 관해 저술했다. 《마이크로 그라피아》(Micrographia)에서 로버트 훅은 코르크 조각과 같은 생물학적 구조에 세포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과학자들이 세포를 생물의 기본 단위로 여기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현미경적 세계가 확대됨에 따라 거시적 세계는 축소되어 갔다. 존 레이와 같은 식물학자들은 지구 곳곳에서 새로 발견된 많은 생물을 일관된 분류 체계와 일관된 신학(자연신학)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다른 주제인 태고의 먼 옛날에 대한 논쟁들은 고생물학의 발전을 촉발했다. 1669년에 니콜라스 스테노는 어떻게 살아있는 생물이 퇴적층에 갇히고 광물화된 화석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중수필을 출판했다. 화석에 대한 스테노의 생각은 잘 알려졌었고, 자연 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멸종이나 지구의 나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논쟁으로 18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박물학자는 화석의 유기적 기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